I am F(학점).
국가를 하나의 단수개념으로 보았을 때 IMF의 구제대상국가였다면
낙제대상이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만약에 98년도의 IMF가 기업들에게 서바이벌게임이었다면 나는 살아남았으니
I"m not F 였다고 해도 될라나?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국가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선거에 의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고 자긍심을 가져볼 여유도 없이 온 나라를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혼란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은
IMF프로그램이 돌아가기 시작한 게 그리 오래전의 일같지 않은데 벌써 두 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니
세월은 참 빠르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 미국에서는 서브프라임사태로 온 세계 금융시장이 몸살을 앓고 있고,
일본에서는 91년을 꼭짓점으로 시작된 부동산버블붕괴사태가 터지면서 10년이 넘도록 고생을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자국 내에서 스스로 극복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으니 일천한 시장경제의 기반과 규모가 단적으로
드러난 국가적인 재난이었다.
세계에서 유래 없는 경제성장률이니, 개도국의 모범국이니 하는 칭찬은 사상누각에 불과했던 듯, 조롱과 동정으로
바뀐 상황에서 전 세계적인 쪽팔림을 감수하며 IMF에게 경제적 주권을 넘겨주고 온 국민이 패닉상태에 빠졌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다행히 그 외환금융위기를 잘 극복해서 10년이 지난 현재는 훨씬 더 탄탄한 국가경제체질을 갖추고 경제규모도
그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졌지만 그 IMF사태는 모두에게 엄청난 시련을 요구했다.
(현찰을 많이 갖고 있던 극히 일부분은 오히려 노가 났었다고도 하지만.......)
다들 힘들었겠지만 6~7년 고생고생해서 겨우 손익분기를 넘기고 은행 빚 얻어 조그마나마 내 공장 장만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참에 벌어진 상황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결제대금으로 받아 놓은 어음쪼가리가 휴지로 변하는 것은 맘고생하면서 결국은 포기하게 될 터이니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 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95년부터 임대해서 쓰던 군포에 있는 임대공장은 월 250만원이라는 거금을 매달 임대료로 지불하고 있었는데
임대료가 너무 부담이 되어서 더 싼 곳으로 옮기려고 알아보던 참에 우연한 기회에 당시에는 생소한 아파트형공장
을 소개 받고 한동안 고심을 하다가 큰맘을 먹고 덜컥 계약을 해 버렸다.
당시의 재정형편으로는 좀 무리였지만 정식으로 공장등록이 되는 내 공장을 가질 수 있다는 유혹과
분양대금의 70%를 3년 거치 5년분할상환이라는 조건에다 대출 금리도 당시 일반시중금리보다도 훨씬 저렴하게
되어있어서 단순계산을 해보니 그 때 매달 지출하고 있는 공장임대료만 꼬박 8년간만 내도 저절로 공장이 하나
생기는 계산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그 파격적인 조건이라는 게 외화대출이라 가능했는데 설명을 대충 들었지만 그게 뭔지 자세히 알고
계약한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그런 금융상품자체를 접할 기회도 없었거니와 그런 금융상품은 정부 같은 데서
기업지원자금으로나 적용하는 특별한 특혜금융상품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부족한 잔금을 여기저기서 꿰맞춰서 97년도 따뜻한 봄 겨우 입주를 하고 나니 그렇게 넉넉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내 공장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만족감은 아마도 날아갈 것 같다는 표현이 적합할 만큼 Up된 기분을 제공해 주었고
그동안의 고생이 보람이 있었다는 감회와 이제는 최소한 중요한 한 가지는 잊고 지낼 수 있다는 안도감에
사업개시후 처음으로 속된말로 기분째지는 나날을 보냈던 것 같다.
(오랜 셋방살이 끝에 내 집 장만한 사람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BUT, 그 IMF구걸금융이라는 국가외환위기는 그 행복한 시기를 1년도 채 만끽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1997년도 후반에는 이미 곪아 터지기 직전이라 경기는 바닥을 기고 있었고 영세기업들이나 자영업자들은 대부분
근근이 버텨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막상 IMF사태가 터졌다고 해도 당시에는 그게 뭔지, 또 어떤 상황이 닥칠지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대통령선거와 맞물려서 선거시즌이 되면 의례히 상대당을 깎아내리기 위해 실정을 과장해서 비난하고
누구 말이 맞는 말인지도 판단할 수 없는 흑색선전이나 공약이 난무하는 아수라판 같은 상황에서
장영자어음사기사건같은 대형 금융사고가 또 터진 모양이다정도로 생각했고 정부나 은행 등의 금융권이야 당장
발등의 불을 끄기에 바쁘겠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이전에 있어왔던 유사한 사태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긴축정책이나
불경기지속, 어음부도율증가등 경제여건이 더 악화되는 정도로 다가올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인가보다하고 생각했었
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본격적인 IMF프로그램이 가동하면서 전개된 상황은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경제적
재난으로 나타났다.
외화는 2배 이상으로 폭등하고 대기업어음들이 줄줄이 부도나면서 하루에도 수십,수백개기업들이 도산하고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서도 20%이상 감원에다 급여삭감등으로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나고 해가 지면
서울역전 지하도는 노숙자들로 바글대기 시작하고 정말 가공할만한 위력으로 한국 사람들의 숨통을 조여 나갔다.
나도 몇 천만 원어치 어음이 휴지조각이 되었지만 그 정도 갖고 물렸다고 했다가는 배부른 소리하고 있다고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인 상황이었으니 지금 되새겨 봐도 끔찍하기 그지없다.
직원들이 불안해 할까봐 감원은 없을 테니 동요할 필요는 없지만 정신들 바짝 챙기자고 독려하면서
정말 오랜만에 일거리가 없어서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걱정하면서 경비를 줄이기 위해 서울사무실을 공장으로
합쳐야 하나 마나 고민하면서 내부정리나 개발한답시고 일거리를 만들어 놓으면서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해 나가야 하나하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서 반강제 꺾기로 들어 놓은 적금이 만기가 되어 가뭄에 단비처럼 그 돈으
로 여기 저기 지출을 잡아놨는데 주거래 은행인 기업은행에서 인출을 허용해주질 않았다.
여직원이 은행에 전화를 하니 사장이 직접 은행에 나와 줘야 되겠다는 것이다.
아니 적금이 만기가 되어서 돈을 찾겠다는데 무슨 소리냐 하며 직접 전화를 걸었더니 미안하지만 진정하시고
잠시 은행에 나오면 자초지종을 알려 주겠다나?
아니 이건 또 뭔 황당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은행에 나가니 평상시에는 바깥창구에서 업무를 보려고 해도 지점장님이 계시니까 안으로 들어오라면서 지점장실로
인도하면서 차 한잔하시라고 호들갑을 떨며 거북스럽게 하던 사람들이 그날따라 말단대리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형식적인 인사치례를 하면서 잠시 보자고 하더니 현재 대출금에 대한 담보가 한참 부족하여 만기가 된 적금이
현금담보로 잡혔다나?
그리고 그 금액 갖고도 담보가 한참 부족하니 추가 담보를 제공해야 한단다.
아니 이게 뭔 귀신씨나락까먹는 소리여?
돈 빌릴 때마다 감정가에 70%밖에 쳐주지 않는 부동산담보 다 잡혀 놓고 거래 관례상 적금도 들어줘야 한다고
해서 적금도 들어주고, 하나도 안 고마우면서도 고맙다고 저녁식사에다 술까지 처먹여주고 거래처에도 안 갖다 주는
명절선물까지 꼬박꼬박 갖다 바쳤는데......
내용인 즉은 이렇다.
아파트형공장을 입주하면서 받은 외화대출이 미화달러였는데 달러가 2배로 뛰어서 담보도 2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대출받은 지 1년도 안되었고 3년 거치 조건이니 아직 상환시기는
한참 남아있고 또 내가 이자를 연체한 것도(이자도 달러라서 따블로 냈음) 아니고, 은행거래에서 약점잡힐만한
부실한 짓거리를 한 것도 없는데.....
담보로 제공된 지은 지 1년밖에 안되는 공장건물은 튼실하게 잘 있고....
그리고 나라가 온통 난리판이 된 일시적인 상황을 감안해서 5년 이상 성실 거래한 고객에게 그렇게 팍팍하게
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대출건은 내가 Fine Bank 기업은행에 직접 부탁해서 대출받은 게 아니고
자기네가 해주겠다고 자발적으로 대출을 해주었기에 더, 더욱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원래 아파트형공장분양에는 시행사가 주거래 은행을 끼고 진행하므로 분양신청을 할 때 그 해당은행에서
융자를 해 준다.
내가 입주한 안양의 동일테크노타운도 우리은행이 주관은행이라 입주자대부분은 그 곳에서 융자를 받았다.
나도 당연히 분양사의 진행프로그램에 따라서 진행할 요량으로 서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지점에
들렀다가 차 한 잔하고 가라고 지점장이 불러들여 들어갔다가 특별히 할 얘기도 없고 해서 조만간 분양공장에
입주예정이라고 자랑삼아 말했다가 그게 빌미가 되어 주거래은행이랍시고 호의를 베푸는 행세를 하여 마지못해
응해줬던 터였다.
사실상 안양의 인덕원근처의 공장의 은행 업무를 그 분양사에서 사전에 준비된 업무진행방식으로 처리하는 게
훨씬 매끄러운 업무처리었다.
지금처럼 전산망이 완벽하던 때도 아니고 서울 방배동에 있는 지점이 행정구역도 벗어난 경기도 안양의 그것도
그 당시에 생소했던 아파트형공장을 담보로 리보금리 플러스가 적용되는 외화대출을 본점에서 대출승인이 나니
마니하면서 직원이 낑낑대며 처리하는 걸 괜스리 미안스럽게 지켜보면서 괜한 짓했다고 느꼈던 게 바로 이 대출건
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점장은 어렵게 해줬다고 같잖게 생색내고 기분맞춰주려고 수고많았다고 내키지 않는 인사치례하고....
그걸 다 떠나서 지점자체에서 우리의 거래규모란 게 무시해도 될 만한 소규모이고 또 잘은 모르지만 이 정도라면
지점장의 권한으로도 충분히 배려해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들어 이 件을 주도한 지점장좀 보자고 했다.
은행문을 들어설 때 지점장은 내가 분기 탱탱해서 들어오는 걸 보고는 못 본척하며 슬쩍 지점장실로 들어가는 걸
보긴 봤다.
그랬더니 안이 비치는 지점장실유리창벽안쪽에 있는 지점장은 혼자서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는 듯한데
지금 바쁜 업무 때문에 곤란하단다.
결국 인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꼭지를 터트리고 말았다.
“이거 왜이래? 내 돈 내가 찾아가겠다는데 도대체 왜 안주는 거야? 내가 언제 이 적금을 담보로 잡혔냐?
서류있슴 내 놔 봐!!“
하면서 언성을 높이니 사방에서 은행에 온 고객들과 직원들의 시선들이 따갑게 와 꽂혔다.
앞에 앉아있던 직원도 화들짝 놀라 “사장님 왜 이러십니까? 이러심 안 됩니다”하며 만류한다.
“안되긴 뭐가 안 돼?
만기 안 된 돈도 해약하고 달라면 당연히 주는 건데 만기 다 된 돈 찾아가겠다는 데
누구 맘대로 안 된다는 거야? “
하고 고함을 한 번 더 질러대면서 문짝도 없는 지점장 실안에 있는 지점장을 흘낏 들여다보니 깊은 상념에 잠긴
듯 숨죽인 채 앉아 있고, 나이가 좀 든 차장이 황급히 와서는 잠깐 자기하고 얘기하자며 구석으로 끌고 갔다.
결국 돈은 찾아 나왔다.
대신에 아직 만기가 안 된 몇 개의 적금들은 담보로 제공하기로 양보를 하고....
그나마도 양보를 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지만 거기서 쓸 데 없이 시간 낭비할 여유가 없었고 현실적으로
은행과 등지고 사업을 한다는 게 불가능한 실정에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 사장 회사같이 실속 있고 탄탄한 회사는 별로 없다는 둥 입바른 소리를 하며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에게 말하라던 지점장을 인간적으로 친해보려고 노력도 했었고 남들이 높디높다는 은행문턱이
나에게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공생관계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랜 기간 동안 신용도 많이 쌓고 점수도 많이 따놔서 내가 아쉬울 때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든든한
원군하나 두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질러대는 고함소리를 다 들으면서 직접 나서지 못하는 지점장에 대해서는 연민과 배신감이 같이 밀려 왔다.
모든 게 일장춘몽으로 끝난 기분이 들었다.
어릴 때 소풍갈 때 싸갔다가 남은 삶은 달걀을 아껴두고 먹으려고 설합깊숙히 숨겨 놓았다가 막상 먹으려고 깨보니
그 심한 악취와 함께 느꼈던 허망한 기분이 이랬던가?
정나미가 떨어져 다시는 그 지점에 가고싶지 않던 터에 허리띠를 졸라매기 위해 방배동사무실을 폐쇄하고 공장과
사무실을 합치면서 주거래지점도 인덕원지점으로 아예 바꿔버렸다.
은행만을 바꾼 게 아니라 은행에 대한 고정관념도 확 바꿔 버렸다.
그 시절즈음해서 가수 이정현의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하는 노래가 대유행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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