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공사이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전개되었다.

주문과 시공의뢰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면 이불속에서 이게 꿈이 아니고 진짜 현실이 맞는가하고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했다.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었는지는 그 때는 정확히 몰랐다.

나중에 분석해 보니 다음 3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았다.

첫째,

초기 유일한 아이템인 비닐커텐은 동절기에 공장출입문에 설치하여 바람막이나,보온,먼지유입방지등을 주목적으로

이용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날씨가 추워지자 대기수요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

둘째,

그동안 제품의 설치필요성은 갖고 있었으나 시공실적이 없어 시공능력을 의심하던 업체들이 실제 시공사진을 보여주자 신뢰감을 갖고 주문을 하기 시작한 것.

그리고 셋째는,

직접 첫시공을 성공적으로(?) 마친 나자신의 자신감이 보다 적극적인 영업활동을 할 수 있었고

그 자신감이 고객의 눈에 긍정적인 요소로 비쳐진 결과도 무시할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고 본다.

특히 반월공단은 당시에 수도권에서 가장 큰 공단지역이었고 그 공단 한 복판에 꽂아놓은 깃발은 대단한 영업력을 발휘했다.

그 이후로 그 공단내에서만 해도 보령제약,동양기전,신대양제지,대한약품,동양기전,대덕전자,동양피스톤,현진제업,한국바이엘,서울차체,대성전기,계양전기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형업체들로부터 수년간 꾸준히 수주를 했다.



하루하루를 눈,뜰 새 없이 정신없이 보내던 그해의 끝자락에 원효로에 있는 현대자동차서비스 본사 물류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울산에 있는 현대차물류창고에 비닐커텐을 설치하고 싶다는 것이다.

당시 국내굴지의 대형공장답게 문폭이 최소6M ~ 8M에다, 높이도 5M ~6M나 되는 대형 출입구를 한,두개도 아니고 8개나 설치하려고 하니 견적을 넣어달라고 했다.

바닷가라서 바람도 억수로 부니까 제일 두꺼운 소재로 해 달라는 단서까지 붙여서...

재고로 갖고 있는 두께 3MM자재를 통통 털어도 그런 문 세짝이나 처리할 수 있었던가?

더군다나 제일 두꺼운 소재인 4MM는 재고도 없을 뿐 아니라 일본서도 별로 쓰지도 않고 공장에 물어보니 재고도 충분치 않다는 거다.

금액만 해도 얼추 1000만원이 넘으니 당시 회사 매출기준으로 한달평균액이 넘었고

400Km나 떨어진 원거리에다, 자체 시공팀도 없이 작은 거 몇건 시공한 게 전부인데

이런 대형문의 시공이 가능할 지도 확신이 서질 않았고

계약을 한다고 해도 그렇치 않아도 팍팍하게 돌아가는 자금사정에 돈관경색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이걸 견적을 넣야하나, 말아야 하나 딜레마에 빠졌다.

대형회사니까 발주를 해도 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이행이니 하자보증이니 갖출 건 다 갖출텐데 괜히 욕심때문에

들이밀었다가 본전도 못추리는 게 아닌지 겁이 났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괜시리 똥폼 잡다가 피똥만 싸고 주저앉고 말지도 못한다는 생각이 자꾸 교차했다.

하지만 한 편에서는 언젠가는 넘어야 할 수준인데 하늘이 주신 호기를 소심하게 포기하고 말아야할 지....

이걸 잘만 마무리하면 그 쪽 지방에 대형업체들을 공략할 수 있는 교두보역활도 기대할 수 있을텐데하고,

자책과 욕심도 계속 머리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판단이 서질않아 견적을 제출하기로 한 시한을 넘기고 말았는데 왜 안보내냐고 독촉전화가 왔다.

에라이~ 모르겠다.

뭐 견적 넌다고 발주가 다 되는 것도 아닌데하고 납기, 금액을 널널하게 챙겨서 FAX로 발송했다.

그리고 한 이틀정도 잘했다, 잘못했다, 고민하다가 바쁜 일상에 밀려서 다 잊어 버리고 다시 발바닥에 땀나도록 돌아다녔다.

한참이 지나서 상황이 종결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달가까이 지난 12월 초순 구매과에서 들어오라고 전화가 왔다.

오 주여~ 왜 나를 다시 시험에 들게 하십니까?

나한테는 큰 금액이었지만 그 쪽에서는 조금 큰차 한대값밖에 안되는 액수인지라 일사천리로 계약이 진행돼어 버렸다.

구매과의 요구조건은 단 한가지, 물류팀에서 춥다고 아우성이니 최대한 빨리 설치해 달라는 거 였다.

이제는 엎지러진 물을 갖고 고민할 일도 없다.

단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일을 마무리하는 방법밖에는 해결책이 없었다.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해태의 김응룡감독이 멀쩡한 애들 데리고 가진 게 없다는 걸 푸념삼아 한 말이다.

반면에 나는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기술도 없고.... 게다가 시간도 없고....

현대의 왕회장은 거시기 두쪽만 차고 영국으로 건너가서 거북선이 새겨진 오백원짜리 동전하나 내밀고 융자를 받아서 현대조선소를 세웠다는데 차한대 값밖에 안되는 공사 한 건가지고 찌질대고 있으니 참 내자신이 초라하기도 했다.

결과는 싸움의 고수 백윤식이 즐겨 애용했던 말대로, 주제넘게 까불다가 피똥을 싸지도 않았고,

매서운 울산 방어진 겨울 칼바람에 고전을 좀 했고 사방팔방 자금구걸하며 스타일이 좀 망가지긴 했어도 납기내에 완벽시공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게다가 보나스로 옆집인 현대중공업에서 추가 오다까지 넙죽 받아서 챙겼으니 2,3개월의 짧은 기간에 대단한 반전이 진행된 셈이다.


그래봤자 요즘 좀 괜찮은 차 한대값도 안되는 걸 가지고......


* 울산 동구 방어동 바닷가에 소재한 현대차물류창고 시공사진
* 아래는 현대중공업에 설치된 중장비 세척장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