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매출이 발생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일 뿐,

얼마나 가야 어둠속을 벗어날 지 모르는 터널을 이렇게 계속 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도 판단할 수도 없었고,

또한 이 길이 출구가 없는 막힌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면 때론 두렵기 조차 했다.

막연하고도 답답한 행보에 잠시나마 기대볼만한 멘토라고는 주변에 전혀 없었다.

단지 벌여놓은 상황에서 그야말로 빼도박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더이상 버틸 수 없는 바닥까지 무작정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광고매체도 늘리고 이에 비례해서 문의전화도 조금씩 빈도가 늘어갔지만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설치공사문의에는 뻥(없는 실적이나, 막연한 납기등)의 수위를 저울질해가며 상담을 한 번하고 나면 맥이 다
풀릴정도였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아무리 성심성의껏 대응하고, 맡겨만 주면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완료검수후에 만족하지못하면 대금지불중지도 감수하겠다고 해도 공사실적도 전무한 신생회사에 모르모트가
되어줄 회사는 없었다.




설치공사를 하지않으면 부가가치가 없었고, 수입원자재가 제품원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Cost구조상으론 환률변동에 무방비상태였고, 판로개척을 위해서 실적은 꼭 필요했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첫공사의 발주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받았다.

반월공단에 양지코츠라고 하는 외국투자업체가 있었다.

상담요청을 받고 방문해 보니 그 회사의 경영자는 파란눈과 큰코를 가진 외국인이었는데 직접 만나서 제품견본을
보여주고 간단한 설명을 하니까 현장에 가서 실측을 하고 설치견적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뭐 어디에 설치한 적이 있는냐, 회사가 어디에 있으며 얼마나 되었느냐, 인원이 몇명이냐, 으례 겪은 이런 통과의례는
처음부터 언급이 되질 않았다.

견적을 넣고 며칠되지 않아 한국인관리자에게서 금액네고요청이 왔고 다시 며칠후 결제가 났으니 공사를 해 달란다.

그 어렵던 관문이 전혀 뜻밖의 서포터를 만나 의외로 쉽게 통과된 셈이다.

내 판단으로는 그가 나를 믿고 프리패스로 일을 맡겼다고는 보질 않는다.

유럽에서는 이미 많이 보급되어 있는 상품이었고 한국에서 큰 잡지에 광고를 싣은 제품이니 당연히 시공상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한국인관리자또한 회사사장이 직접 상담하고 진행하라고 지시한 사항이니 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업무를 진행했다고 본다.

어찌보면 소가 뒷걸음질하다 쥐잡은 꼴인데 정작 발주를 받고나자 겁이 덜컥 났다.

시공에 사용할 금구도 일본제품은 단가가 맞지않아서 기본형견본만 구해다가 대충 COPY제품은 만들어 보았는데

클레임이 걸리지 않을 지 걱정스러웠고, 그보다 더 심각한 건 누구를 데려다 시공을 할 것인가이다.

일본애들이 어떻게 시공했는지 제대로 본 적도 없고 물건을 파는 나조차 생소한 제품을 제대로 설치해 줄 사람이란

애당초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설치현장을 몇번씩 다시찾아가서 실측을 반복하고 현장구조에 따른 가장 이상적인 설치방법을 연구해 보았다.


그리고 D-day.

샷시시공하는 친구 둘을 일당 후하게 쳐준다고 불러서 현장에서 직접 Sheet재단,가공, 설치를 지시해 가면서

같이 시공을 했다.

지금 같으면 몇시간거리도 않되는 비닐커텐 몇셋트 작업을 3명이 하루종일 매달려서 겨우 마쳤다.

다행히 업체도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 작은 첫공사를 위해 적지않은 스트레스와 발품을 팔면서 불필요한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켰지만,

막상 무난히 종결짓고나니 그간의 힘들었던 과정은 눈녹듯 사라지고

새로운 영역을 확보한 민족감에 엔돌핀만이 몸구석구석에서 솟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Open해서 4개월만에 첫매출, 다시 4개월만에 첫공사....

그렇게 91년도의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


* 양지코츠공장에 설치된 비닐커텐 사진

인쇄용잉크를 제조하는 공장인데 동절기에 내부온도유지를 위해
외기를 차단하고 분진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할 목적으로 설치.